촛불이 항쟁을 만들었다. 21년전 돌과 쇠파이프와 피로 이루어낸 승리를 우리는 지금 작은 촛불 하나로 만들어 내고 말았다. 독재자의 얼굴이 달라졌다고 해서 독재자가 사라진 것이 아니다. 고문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고문의 형태가 달라졌을 뿐이며, 감시와 사찰의 흔적은 여전히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에 상존하고 있다. 식민의 구호는 퇴색되었다고 하나 친미사대주의는 여전히 판을 치고 있다. 마찬가지로 '민중'이라는 말은 역사 속에서 나와 지금 우리 광장에 다시 서고 있다. 광화문에서 남대문까지 이어진 촛불은 한점의 희망들이 모여 만든 거대한 불바다였다. 인간이 만든 어느 불빛이 이처럼 맑고 순수하며 위대할 수 있을까. [출처] 벗이여 해방이 온다 - 윤선애 |작성자 파즈
시골에 내려가면 으례 방문해야 하는 곳은 큰집, 작은집, 큰고모집, 외갓집이 있다. 앞에 세 곳은 구례에 모두 있으니 하루만에 다 방문할 수 있지만 외갓집만은 순천시 주암면에 자리잡고 있다. 구례에서 멀다면 멀고, 서울에 비하면 가깝다고도 할 수 있는 거리다. 6일 큰고모집에서 자고 7일 외갓집을 향해 나섰다. 사실 아침 일찍 나섰지만, 기왕이면 화엄사와 송광사에 들려 구경이나 가자고 말씀드렸다. 아버지 생신도 끼어 있고 해서 오랜만에 가족들끼리 나들이를 제안해 본 것이다. 아버지는 바쁜 시기에 놀러다니는 게 못할 짓이라며 펄쩍 뒤셨다. 하지만 어차피 외갓집에 가도 외숙부나 외숙모 모두 들일 나가셨을 테니 좀 늦게 들어가는 게 좋다고 설득을 했다. 혀를 차시면서도 이내 그렇게 하자고 하신다. 화엄사는 구..
농번기에는 부엌의 부지깽이도 돕고, 부뚜막의 고양이 손도 아쉽단다. 아버지는 그래서 시골의 모내기에 맞춰 고향에 내려가셨다. 아버지의 고향은 전라남도 구례의 산골마을이다. 그리고 나와 어머니는 현충일이 낀 연휴에 맞춰, 그러니까 국민MT(72시간 릴레이 촛불집회) 기간에 구례로 내려갔다. 일손을 돕자는 생각이었다. 물론 이 기간에 아버지의 생신도 끼어 있기도 했다. 5일 오후 3시 15분 영등포역에서 출발하는 무궁화호에 몸을 실었다. 집에 차가 생긴 이후 기차를 타고 시골집에 내려갈 일은 없었다. 오래만의 기차여행이다. 어머니와 함께 맥주도 사서 마시고 삶은 계란 껍질도 벗겨보았다. 그러다가 영등포역에서 구입한 잡지를 보기도 하고, 또 그러다 시큰둥해지면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에 멍한 시선을 던지기도 했..
지난 금요일 사진이다. 그러니까 잠실에 있는 에 가고, 시청 서울광장에서 열린 촛불집회도 참가하고, 돌아오는 길에 성산대교의 야경도 찍은 것이다. 이날 하루종일 자전거로 돌아다닌 거리는 대략 100km. 이날의 황사는 최악이었다. 마스크를 단단히 하고 나갔다고 하지만 저녁에는 목이 칼칼할 지경이었다. 보통 야경은 조리개를 최대한 조여주어야 사진처럼 빛의 파장이 멋지게 나올 수 있다. 물론 조리개를 조인다면, 그만큼 셔터속도가 늘어나니, 그런부분을 감안해 사진기를 고정할 수 있는 지지대를 마련하거나 삼각대를 준비해서 찍는게 좋다.
외워야 할 것은 어찌 그리 많았는지, 생각해 보면 미술시간은 가끔 곤혹스러운 일의 연속이었다. 표현의 재미를 느끼기는 커녕 어찌하면 선생님한테 핀잔듣지 않을까 전전긍긍해야 했고, 어쩌다 준비물을 빼먹으면 다른반을 돌아다니면서 준비물 챙기느라 바빴다. 미술감상은 감상이 아니라 암기였고, 표현도 표현이 아니라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는 일과 다를게 없었으니 말이다. 그래, 아주 오래전 일이다. 그렇게 대학에 다니기 전까지는 미술관 근처도 가지 못했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갔다. 선배가 미술관 가자고 했다. 그리고 찾아간 미술관은 인사동의 학고재 화랑. 당시 강요배 화백의 4.3제주항쟁 그림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러나 대학생활하면서 미술관에 갈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시청 근처의 ..
스탭진의 글을 봤습니다. 맞습니다. 무분별한 정치꾼들의 글이 올라오고, 정제되지 않고 무분별하게 펌질되는 글들은 반대합니다. 그리고 정부나 네이버가 제시하고 있는 정책의 한계선도 넘어서기 힘든 부분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언로는 열어야 합니다. 말은 터야 합니다. 가두어 두어서 소통을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인터넷이 왜 생겼고 카페가 왜 생겼습니다. 같이 이야기하고 소통하자고 생긴 것 아닙니까? 그 근본을 생각해 봅시다. 스텝진 여러분, 전 여러분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고생하시는 거에 대해서 정말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에서 많은 고민이 드는 것도 잘 압니다. 하지만 '금지'라고 전면에 내세우는 정책은 옳지 않습니다. 무분별한 펌질로 게시판을 오염시키는 것은 막아야 하지만 기본적으로 열어..
이런 집회는 처음이다. 그렇게 많은 시위와 집회로 거리에 서봤지만, 이번만은 분위기가 다르다. 아이들 손을 잡고 나온 가족도 보이고, 연인끼리 나온 사람도 있다. 넥타이 메고 앉아있는 셀러리멘도 있는가 하면, 투쟁조끼를 입고 있는 노동자도 보인다. 중절모에 머리 희끗희끗한 할아버지도 있고, 개량한복 입고 나온 할머니도 보인다. 마실나온 것처럼 가벼운 옷차림의 아주머니가 있는가하면, 보기만 해도 아슬아슬한 옷차림에 세련된 화장을 한 아가씨도 있다. 나처럼 자전거 타고 나온 사람들도 보인다. 그뿐인가, 군복을 입고 시위대를 보호하는 예비군들이라니! 마스크를 하고 있는 이들은 대부분 중고등학생이다. 교복을 그대로 입은 아이들도 보인다. 여기에 배후도 없고 주동자도 없다. 이런 집회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
“어슴푸레한 계곡에 홀로 있을 때면 내 영혼과 기억, 그리고 빅 블랙풋 강의 소리, 낚싯대를 던지는 4박자 리듬, 고기가 물리길 바라는 희망과 함께 모두 하나의 존재로 어렴풋해지는 것 같다, 그러다가 결국 하나로 녹아들고, 강물을 따라 흘러들어 가는 것 같다….” - 영화 의 마지막 내레이션 누가 영화보자고 하지 않는 이상 웬만해서는 영화를 잘 보지 않는 나에게도 내돈 내고 소장하고 있는 DVD가 하나 있다. 바로 브래드피트가 나오는 이다. 영화가 가지고 있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영화포스터가 주는 풍경에 압도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빅플랫풋 강변에서 플라이낚시를 하고 있을 자신을 상상해 보지 않을까. 여행은 참 좋아하면서도 낚시 여행은 단 한번도 없었다. 친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