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휴머니즘 -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지음, 이두부 옮김/이후 다행히, 난 가난하지 않다. 그렇다고 부유하고 넉넉하게 살아가는 건 아니다. 출판사에서 일하는 삼십대 중반의 미혼 남성의 삶이란 게 거기서 거기다. 아침마다 부대끼는 대중교통에서 졸면서 출근하고, 점심시간마다 오늘은 얼마짜리 밥을 먹나 고민하고, 휴일도 반납하며 철야도 마다하지 않고 회사에 매달려 살아간다. 누구나 그렇지 않나? 열심히 산다면서 항상 불안하다. 노숙자나 거지를 보면 애써 피하는 이유는 미래의 내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지금 삶과 노동에 대해 불만이 가득하면서도 참고 사는 것은 그런 가난이 가져올 ‘충격과 공포’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가난하지 않은 것에 안심하고 있다. 우리 의식은 노숙자나 거지를 피하듯..
조수미 - 미싱 유 - 여러 아티스트 (Various Artists) 작곡, 데이비드 퍼먼 (David Firma/유니버설(Universal) 정문 수위실에 내 앞으로 등기가 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내 반응은 “웬 등기?”였다. 나에게 등기로 올 물건이 있나? 인터넷을 주문한 상품은 없고, 내가 직장을 옮긴 건 얼마 안 되어 지인들도 내가 다니는 곳의 주소를 잘 모른다. 그런데 등기라니? 물건을 받아보니 한국방송의 ‘송영훈의 가정음악’ 프로그램에서 보내온 물건이었다. 아, 이벤트에 응모한 게 당첨되었나보다. 사실 이벤트 응모한 기억도 가물가물하고 어떤 물건일지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모양으로 보면 CD가 아닐까 싶었는데, 열어보니 맞았다. 조수미의 앨범이다. 세계적인 소프라노 가수 조수미가 11개국의 ..
나도 유가환급금을 받는다. 자전거 열심히 타고 대중교통 이용하고 다녔는데, 뜻하지 않는 공돈이 생기는 기분이다. 물론 이렇게 빠져나가는 돈을 세금 더 걷어서 채울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정유사를 압박해서 기름값 내릴 생각은 안 하고, 국민 세금을 풀어서 정유사 면책해 주는 정책인 셈이다. 여하튼 이놈의 정부는 친기업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러면서 서민 대책으로 생색은 무지 내고 있다. 아무튼 회사에서는 오늘을 유가환급금 신청 마감일로 잡고 있었다. 그런 사실도 모르고 교정지에 코를 박고 연필만 굴리고 있었으니, 갑자기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격이다. 어떤 신청서가 필요한지 옆에 직원에게 물어보니 홈페이지에서 신청서 내려받아서 작성하고 원천징수영수증을 총무과에 내야 한단다. 원천징수증은 작년에 내가 ..
점심 식사를 하는 중에 후배가 전화를 해왔다. 학교 때부터 싹싹하고 밝고 명랑했던 후배인데, 나와 함께 여러 일들을 같이 진행했던 터라 나름대로 정도 들었던 후배였다. 그러던 후배가 어느날 군인과 결혼했다. 그러다 보니 군인 따라 여기저기 지방으로 돌아다녀서 연락이 한동안 끊어졌다. 다시 연락이 된 것은 한 달 전이었을까. 우연히 마트에서 내 동기를 만나 수다를 떨다가 나에게 전화를 했던 거다. “선배, 오랜만이죠. 저 부천 살아요. 애 둘 키우다 보니 연락하기도 쉽지 않네요. 시간 되면 OO선배와 부천에서 봐요.” 벌써 애가 둘이나 되는 주부가 됐는데도, 여전히 그 목소리는 대학 때와 하나도 다를 게 없었다. 톡톡 튀는 고음과 안 봐도 개구쟁이 같은 웃음을 띠고 있을 그 얼굴이 선했다. 그런 상상은 충..
일요일 정오 즈음의 공덕동. 참, /한/산/하/다/. 보통 아침 출근시간이면 지하철에서 쏟아져 나온 인파들이 하나의 방향으로 거대한 물결을 이룬다. 오늘 회사로 가는 내 발걸음은 그리 가볍지 않다. 일이 귀찮고 힘들어서가 아니다. 2차세계대전 독일의 유대인 수용소에서 한 바가지의 물이 배급되었을 때 그것을 생존을 위해 마셨던 사람보다 인간의 존엄을 위해 얼굴과 몸을 씻는 데 썼던 사람들이 더 오래 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어느 심리학 박사의 이야기처럼 일상적으로 오고가는 지루하고 상투적인 출퇴근 길도 아주 짧은 여행으로 생각하는 여유가 나에게 필요한 시점이다.
함허동천에서 오래 서성이다 으슬으슬한 저녁답, 가랑잎 부서지는 소리가 자꾸 발밑에서 들렸네 가을의 초입이라 하늘이 아슬아슬하다. 야근은 점입가경으로 빠져들었다. 살떨리는 주말 근무는 힘겹기만 하다. 휘어져 가는 볼펜꼭지가 불안하게 종이 위에 멈추어 서면 난 옥상에 나간다. 거기서 낮이든 밤이든 가을 하늘은 보면 좋다. 그곳에는 피곤을 달래주는 청명함이 있다. 이 가을의 서늘한 바람소리도 사무실 문앞에서 머뭇거린다. 열기 때문일까, 아니면 열병 때문일까. 사람들은 후끈 달아올라있다. 여기에 가을은 없다. 그래서 자연이 필요하다. 인위적인 흔적들을 지우는 곳이다. 인간의 몸이 자연과 동화하여 생명을 품을 수 있는 곳. 기계적인 시간의 흐름보다는 해가 뜨고 지고, 꽃이 피고 지는 자연의 시간이 우선인 곳. 배..
세계를 더듬다 - 제이슨 로버츠 지음, 황의방 옮김/까치글방 산행 중에 만난 사람 중에 머릿속에서 또렷이 남아 있는 두 사람이 있다. 지난 여름 벽소령에서 만난 시각장애인과 비장애인이다. 지리산 능선길이 잘 가꾸어진 건 사실이지만, 시각장애를 가진 이가 산행을 한다는 건 보통의 평지를 걷는 것과는 달리 몇십 배는 어려울 수밖에 없지 않나 싶었다. 사실 이건 내 과장일 수도 있는데, 당시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2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4시간 만에 왔으니, 딱 두 배의 시간이 들었을 뿐이다. 시각장애인은 스스로 지리산을 가고 싶다는 마음을 먹었고, 그의 친구가 기꺼이 동행이 되어 길을 나섰다. 보지 못하는 그에게 산은 어떻게 느껴졌을까. 모든 이에게는 인간으로서의 가질 수 있는 욕구가 있다. 장애인이든 비장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