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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그 순간이 그립다. 양 옆으로는 곧게 뻗은 참나무들이 적당하게 나 있는 숲의 오솔길, 숲의 향을 온전히 맡을 수 있는 그 길을 걷던 순간 말이다. 그렇게 걷다 보면 숲과 나라는 인간은 온전히 하나되는 합일의 경험에 다가선다. 경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경계조차 서로 다른 종의 경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나는 그 순간 숲에 들어온 낯선 동물의 하나다.


                                                                                       ⓒ강대진(eowls@eowls.net)


지리산을 비롯해 남도의 여러 산을 돌아다니고, 백두대간에 도전한다고 꼬박 열흘 동안 지리산부터 덕유산까지 걸을 때도 그런 순간은 매번 찾아왔다. 어쩌면 이제는 잃어버린 시간이 된 것일까? 산, 숲을 떠나온지 너무 오래됐다. 숲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 책 “숲에서 우주를 보다”라는 책을 들었다.


이 책은 생물학자 데이비드 조지 해스컬이 숲 속 오두막에서 생활하면서 숲의 생태계에 대한 관찰과 그 속에 담긴 생물학적 이야기를 에세이 형식으로 담아 낸 책이다. 숲이 가지는 생태적 환경의 조화, 그리고 그 속에 담긴 태고적 신비, 그로부터 수만년 동안 진행되 온 진화의 오묘함 등을 쉽고 아름다운 문체로 담았다. 이 책에 담긴 인간과 자연에 대한 철학적 고찰은 내 좁은 시야를 다시 한 번 넓혀주었다.


작가는 한 겨울의 추위를 맨 몸으로 도전해 보면서 박새가 겨울을 나는 방법과 그러기 위해 발달할 수 있었던 신체의 비밀들을 비교해 설명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극심한 추위 속에서 죽음의 공포를 느껴야 했다고 서술했다. 이 책에는 이처럼 동물만이 아니라 다양한 식물 생태계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끼, 꽃, 풀, 나무들은 동물들과 함께 공존한다. 나무 하나가 쓰러져 죽으면 그 죽은 나무 주위로 더 많은 풀과 동물들의 보금자리가 싹튼다. 곰팡이부터 도롱뇽까지 수많은 무척추 동물들이 썩어가는 줄기 속과 밑에서 번식한다.

그래서 숲의 건강함은 고사목의 밀도를 기준으로 삼는다고 한다. 죽은 나무들이 숲을 살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이 억지로 나무를 베어 넘어뜨리는 것이 정당화되지 않는다. 언제나 그렇지만 숲의 자연스러운 경쟁과 협력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자연이 진화의 과정을 통해 일궈낸 위대한 작품은 여럿 있지만 그 중에 여기서는 ‘반딧불이’에 대해 소개해 본다.


어둠의 장막이 하늘을 완전히 덮었다. 하지만 만다라[각주:1]를 떠나려고 일어선 찰나 숲이 빛으로 가득 찼다. 반딧불이들은 땅 위 60~90센티미터 높이에 머물기 때문에, 선 채로 내려다보면 바다에 빛나는 부표가 가득 떠 있는 것처럼 지면이 울렁거린다.(생략) 이 비교는 공정하지 못하다. 아기를 현자(賢者)와 비교하는 셈이니 말이다. 우리의 손전등은 기껏해야 200년 전에 발명되었으며 화석 에너지와 화학적 에너지가 풍부한 시대에 발전했다. 사람들은 전구를 개선하려는 노력을 거의 기울이지 않았다. 연료가 무한한데 왜 쓸데없는 수고를 들이겠는가? 이에 반해 반딧불의 설계는 수백만 년의 시행착오를 거쳤다. 반딧불이는 늘 에너지가 부족했기에, 채굴된 화학 물질이 아니라 자신의 식량을 연료로 사용하며 낭비가 거의 없는 전구를 만들어냈다.


자연을 보호하자는 말이 또한 얼마나 인간중심적인 말인지 되새겨 보기도 하였다. 작가는 숲에 버려진 골프공 하나를 치울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깊은 고민에 빠진다. 골프공이 가진 인간적 환경의 특성, 인간은 자연과 동떨어진 존재인지, 인간과 자연은 전지구적 관점에서 하나의 자연을 이루고 있는 것인지, 그렇다면 인간이 만든 그 골프공도 자연의 일부로 보아야 하는지 등등 생각이 뻗어나간 자리에서는 또다른 건강한 싹이 움트는 것이 느껴진다. 


그래서 처음 든 충동은 골프공을 치워서 만다라의 ‘순수함’을 회복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충동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골프공을 치워도 만다라가 산업 부산물로부터 완전히 깨끗해지는 않는다. 산, 황, 수은, 유기 오염 물질이 끊임없이 비에 섞여 내리기 때문이다. 만다라에 있는 모든 생물의 몸 속에는 바깥 세상의 분자 골프공이 흩뿌려져 있다. 나 또한 옷에서 떨어진 섬유 가닥, 외부의 세균, 숨으로  내쉰 외부 분자 혼자 따위를 만다라에 더했다. 심지어 만다라 생물들의 유전 부호에도 산업의 낙인이 찍혔다. 날아다니는 곤충, 특히 사람 가까이에 살던 조상의 후손들에게는 많은 살충제에 대한 내성 유전자가 들어 있다. 따라서 골프공을 치우는 것은 인간의 이 모든 인공물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을 눈에 보이지 않게 하여 인간과 분리된 ‘순수한’ 존재라는 환상을 유지할 뿐이다.

순수의 충동은 심층적인 두 번째 차원에서 무너질 것이다. 인간의 인공물은 자연에 묻은 얼룩이 아니다. 이런 시각은 인간과 나머지 생명 공동체를 갈라 놓는다. 골프공은 똑똑하고 놀기 좋아하는 아프리카 영장류의 마음이 물질로 구현된 것이다. 이 영장류는 신체적·정신적 솜씨를 겨루는 놀이를 고안하는 일을 좋아한다. 일반적으로 이런 놀이가 펼쳐지는 무대는 이 영장류가 떠나온, 지금도 무의식적으로 갈망하는 사바나를 꼼꼼하게 재구성한 복사판이다. 똑똑한 영장류는 이 세계에 속한다. 영장류의 생산물도 이 세계 속할 것이다. 이 유능한 영장류가 자신의 세계를 통제하는 데 능숙해지는 과정에서,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이 생긴다. 이를테면 지금껏 보지 못한 화학 물질을 합성할 수 있는데, 그중 일부는 생명체에 유독하다. 대다수 영장류는 이러한 역효과를 미처 생각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영장류는 자신의 종이 세상에 미친 영향을 굳이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특히 아직까진 비교적 멀쩡해 보이는 곳에서라면 더더욱 그렇다. 나도 그런 영장류 중 하나다. 따라서 골프공이 숲에 떨어진 것을 보았을 때 내 마음은 골프공과 골프장, 골프객, 이 모두를 낳은 인류 문화를 욕한다. 하지만 자연을 사랑하고 인류를 증오하는 것은 비논리적이다. 인류는 전체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진정으로 사랑하려면 인류의 창의성과 놀이 본능 또한 사랑해야 한다. 인간의 인공물이 남아 있다고 해서 자연이 아름답지 않거나 일관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물론 우리는 덜 탐욕스럽게 덜 어지르고 덜 낭비하고 덜 근시안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책임감을 자기 혐오로 바꾸지는 말자. 우리의 가장 큰 실패는 세상에 대한 연민을 품지 못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우리 자신도 포함된다.    


세상에 대한 연민을 품는 것, 그것은 아프리카 영장류인 나를 비롯한 인간이 세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고 한 걸음 더 자연 속으로 동화되어 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은 인간을 향한 연민으로 나아간다. 나아가 세상을 더 사랑할 수 있는 힘을 독자에게 불어넣어 준다. 이 책이 가진 힘이다. 숲을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닌 숲 속에 있는 나를 상상하게 한다. 오롯이 숲 한가운데로 걸어가는 나와 가쁘게 몰아쉬는 숨소리 사이로 들리는 바람소리, 새소리를 상상한다. 모든 살아있는 것에 대한 경외감으로 가슴이 떨릴 때 스스로 살아있는 것에 대해 기쁨을 느끼게 된다. 이런 생각이 들 즈음, 이 책은 죽음을 풀어내는 자연의 순환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고 있다. 기술의 발전으로 인도에서 독수리가 멸종 위기로 몰리면서 일어난 일이다. 들판이나 숲에서 죽어간 동물들을 1차적으로 분해하고 해체하는 독수리들은 다른 동물과는 다른 특별한 위장을 가지고 있다. 독수리들은 썩어가는 사체에서도 영양분을 흡수하고 열량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독수리들이 멸종 위기로 몰리자 가축이나 야생동물들이 들판에서 그대로 썩어가야 했고, 이로 인해 파리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감염된 들개들이 창궐하기 시작하면서 이로 인한 질병과 광견병이 인도 사회를 괴롭혔다. 또한 독수리의 멸종은 '풍장'을 전통으로 여기는 인도의 파르시 공동체에도 위기를 가져왔다. 인도 사회를 지키기 위해서는 결국 독수리의 보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비슷한 예는 북미에서도 나타났다. 숲을 복원하고 사슴을 숲으로 돌려보내는 과정에서 사슴의 개체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해 숲이 오히려 망가지는 현상이 나타나자 결국 늑대를 넣어 숲의 균형을 유지한 예도 나온다(관련 기사).[각주:2] 하나의 숲이 온전히 유지되기 위해서는 수천년 간 이어져 온 질서가 필요하다. 그것이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지만 복원은 수천년이 걸릴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의 유기화학적 공산물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진화의 신비는 이런 자연의 질서 앞에는 한낱 어린 아이의 손장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연민을 바탕으로 자연 앞에 더 겸손해야겠다.

조만간 아이와 함께 봄이 움트고 있는 작은 숲을 찾아가 보아야겠다. 아이가 보는 숲이 내가 보는 숲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좀 더 소중하고 아름답게 보일 것이라고 자신한다.




숲에서 우주를 보다

저자
데이비드 조지 해스컬 지음
출판사
에이도스 | 2014-06-27 출간
카테고리
과학
책소개
2013년 교양과학 부문 미국 최고의 화제작2013년 미국 국립...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1. 작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숲을 '만다라'라고 표현하고 있다. 온갖 자연만물이 조화롭게 어울려 살아가는 곳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2. 기사가 인용한 논문: William J. Ripple et. al., Status and Ecological Effects of the World’s Largest Carnivores, Science 10 January 2014: Vol. 343 no. 6167 DOI: 10.1126/science.124148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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