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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맞고 잘게 부서진 쪽파의 비극이 여기까지 번지지는 않았을까. 무도 감자도 단단함을 잃지 않았다. 늦도록 장터를 지키다가 떨이로 딸려온 노각이 몸을 구부린다. 물정을 안다는 몸짓이다. 문밖의 상황에 따라 순서가 정해짐을, 뒤집을 수 없음을 예감한 안색이다. 그마저 포기한 쑥갓 한 묶음이 구석에서 시커멓게 절망한다. 물러지는 전신을 바라보기만 한다. 

터주 노릇 하는 김치가 칸칸 일가를 이뤘다. 고춧가루와 젓갈에 휘둘린 배추가 겉절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왔다. 말끔한 백김치는 도시 출신처럼 보인다. 밭에서는 제법 우락부락했을 총각무가 가지런히 통에 누워 순화되는 중이다. 억센 허리로 소금기가 스민다. 갓김치는 남도 출신답게 몸짓이 중모리로 늘어진다. 손가락으로 집으면 육자배기 한 자락이 묻어날 것만 같다. 종횡으로 잘려 한 무더기 깍두기가 된 무가 원래 자리를 찾느라 부산하다. 반투명 통으로 부석거림이 비친다. 묵은지는 길게 누워 풋것들의 살뜰함과 무력감을 보기만 한다. 겨울을 넘겨본 존재만이 가질 수 있는 표정이다. 숙성이라 불리지만 자신들에게는 인내의 시간이다. 적멸로 가는 길은 짜고 맵고 종내는 시큼하다.

- 냉장고, 전영관, 69~70쪽



냉장고 안을 묘사한 표현이 찰지다. 




시인의 사물들

저자
강정, 고운기, 권혁웅, 김경주, 김남극 지음
출판사
한겨레출판사 | 2014-06-16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쉰두 명의 시인이 새롭게 빚어낸 쉰두 개의 사물에 대한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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